성산 김영주원장님 신문기고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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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행사 직원에게 들은 이야기다. 유럽 사람들은 동양인들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관광버스 기사들은 다르단다. 그들은 단체 여행객이나 순례 객들이 오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금세 구별해 낸다. 소란스럽다는 느낌이 들면 중국인이라고 한다. 반대로 말없이 조용조용히 따라가는 관광객들은 일본인이다. 화려한 복장의 여행객들 모습이 보이면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별법대로 해보면 십중팔구는 들어맞는다. ‘빨리빨리’는 한국인들의 또 다른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화’다. 관광버스 기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얘기가 있다. 기사들이 함께 식사하면서 자기 버스의 손님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기사가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했다. 동료 기사들이 왜 그렇게 말도 없이 먹기만 하느냐고 묻자 그 기사가 하는 말. “나는 빨리빨리 먹고 일어나야 해. 우리 손님들이 한국 사람들이거든.” 화려함과 빨리빨리. 그 자체로는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이 표현들이 구체적인 상황과 결부될 때는 긍정적 또는 부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예를 들어 보통 사흘 걸리는 일을 빨리빨리 해서 이틀 만에 해냈다면, 빨리빨리는 ‘부지런함’ 혹은 ‘능력이 뛰어남’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긍정적이다. 그러나 빨리빨리 해서 이틀 만에 해치웠다면, 빨리빨리는 ‘부실’ 또는 ‘대충’과 연상될 수 있다. 이때 의미는 물론 부정적이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과 관련지어 볼 때 화려함과 빨리빨리에 대한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는 데 있다. 개인 소견이지만 우리에게 화려함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기 과시와 허영, 겉치레 등과 더 어울리는 듯하다. 또 빨리빨리는 ‘대충대충’ 혹은 ‘성과 제일주의’와 연관된다. 그렇다면 화려함과 빨리빨리 문화 속에는 순리가 아니라 욕심이 들어 있다. 의욕을 지니는 것은 좋지만 의욕이 지나쳐 과욕으로 변질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약 반세기 전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필리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00달러에 불과했다. 지금 우리는 국민소득 2만 7000달러에 세계 10위권에 버금가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빨리빨리’가 이룬 ‘한강의 기적’이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화려한 성장이다. 그런데 빨리빨리에 집착하다 보니, 내실이야 어떻든 가시적 성과만 거두면 그만이라는 일탈(逸脫)이 생겨난 것은 아닌지. 지난 반세기의 삶을 돌아볼 때 지금 우리 사회는 화려함과 빨리빨리의 그릇된 후유증, 과욕으로 변질된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눈에 보이는 성과에 집착할 때 그릇된 경쟁과 차별 의식을 갖게 된다. 상대방보다 나아야 하고, 전임자보다 나아야 한다. 차별해야 하니 전임자가 닦아 놓은 좋은 정책도 내게는 소용이 없다. 나를 부각하려니 오히려 흠집을 내야 한다. 내 임기 동안에 성과를 거두어야 하니 또 빨리빨리 서둘러야 한다. 그러고는 성과를 냈다고 보란 듯이 과시한다. 그 외양이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속 빈 강정이 되기에 십상이다. 물론 이것이 우리 사회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엄존하는 현실이다. 이 현실이 우려되는 것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가 필요하다. 정부가 그렇고, 사회가 그렇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는 성장의 시간을 넘어 나눔의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이 나누고, 선생님과 학생이 나누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나누는 새로운 시간으로 우리는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긴장, 압박, 쫓김의 시간이 아니라 설렘, 기다림, 이완의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이런 시간을 맞이할 때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창조의 시대를 제대로 열어놓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에서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느림의 미학이 자리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인 1990년대에 오스트리아에서 ‘시간 늦추기 모임’이, 이탈리아에서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더 이상 인간이 시간의 노예가 되는 길을 원치 않았다. 이들은 시간을 주체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사실 시간을 늦춘다고 해서 게으르게 사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늦춤은 곧 성찰의 시간을 가짐이다. 시간에 쫓기게 되면 정신이 없어지며, 정신이 없어지면 불행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정신없는 삶은 가족과 이웃을 잃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근원적으로는 자신을 잃게 만든다. 자신을 찾는 삶, 이웃이 있는 삶은 시간 속에서 여유를 찾을 때 가능하다. 노동은 성공, 놀이는 실패라는 이 공식에서 벗어나 놀이하는 노동으로 우리가 나아갈 때에만 비로소 나와 이웃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사회보다 성장을 중시해온 사회이다. 아니 우리 사회는 급성장을 위해 압축근대화를 감행해야 했던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들 각자는 너무나 여유가 없는 개인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살아야 했던 우리들은 저마다 자신을 잃고 이웃을 잊은 채 고립과 우울을 겪어야만 했다. 우리 사회가 가장 우울한 사회가 되고 OECD 국가 중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사회가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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