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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삼정지기박미희
댓글 0건 조회 541회 작성일 17-12-1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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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상(我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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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법인 삼동회 삼정원장
성산 김 영 주(도영)

 


 

세월은 벌써 11월 마지막을 달리고 있다. 이 때 쯤 이면 사회복지시설은 한 해 동안 시설을 위해 협력해 온 후원자나 자원봉사자들을 모시고 감사의 잔치를 마련하는 행사를 한다. 국가나 지자체의 보조금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자원을 지원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므로 이들의 도움은 시설로써는 대단한 감사가 아닐 수 없다.
 

후원은 선심(善心)이다. 불교용어로는 보시(布施)라 한다. 그리고 보시 중에는 무상보시(無相布施)가 제일이라 한다. 마음속에 아무런 상(相)이 없이 베푸는 보시이다. 보시를 할 때에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이 없이 텅 빈 마음으로 베푸는 보시. 오직 베풀기만 할 뿐 보답을 바라지 않는 보시. 이러한 보시라야 영원한 복이 된다 한다. 이제 눈이 내리고 추위가 더 찾아오면 자선냄비도 거리에 등장할 것이고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천원이 됐든지 만원이 됐든지 그 냄비 속에 작은 선심을 담겨두고 갈 것이다.

 

불교<구잡비유경>에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스님 한 분이 매일 산 속에 와서 좌선(坐禪)을 하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어 식사를 하는데 그 때 그 옆에 원숭이 한 마리가 왔다. 스님은 밥을 원숭이에게 나눠 주었다.
 

다음날, 다음다음날도 스님은 그것을 되풀이 했다. 원숭이는 매일 점심시간만 되면 스님 옆에 와서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다.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스님은 점심을 휴대하는 것을 깜박했다. 그러나 한 끼쯤 굶는다고 해서 별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산에 와서 좌선을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원숭이가 왔다. 전날과 같이 원숭이는 점심밥을 나눠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오늘은 점심밥이 안 나온다. 원숭이는 승복을 잡아당기면서 독촉을 했다.

 

“오늘은 점심밥이 없구먼...”

 

그러나 원숭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원숭이는 스님이 점심밥을 감추어 놓은 것으로 알고 옷 속을 여기저기 뒤졌다. 스님은 귀찮은 생각이 들어 쉬쉬하면서 원숭이를 쫓았다. 그러나 원숭이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은 원숭이에게 나무토막을 던졌다.
 

잠시 원숭이를 놀라게 하려고 했을 뿐 애당초 난폭한 행동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스님은 그런 생각으로 던진 것인데 원숭이는 나무토막에 정통으로 맞아 죽고 말았다.

 

이 설화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도대체 스님은 어떤 마음으로 원숭이에게 밥을 나누어 주었는가가 중요한 포인트이다. 불교에서는 보시 행은 자기 스스로 하는 수행의 일환으로 본다. 그런다면 점심밥을 잊을 리가 없다. 만일 점심밥을 잊었다면 원숭이에게 미안함의 용서를 구하여야 하고, 어떤 경우일지라도 나무토막을 던지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쥐꼬리 같은 선심을 주고 생색내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작은 선심으로 큰 보답을 바라는 마음은 ‘내가 너를 도와주고 있다.’ ‘너는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잠재된 아상의식(我相意識)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서로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해로움이 되기 때문이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이란 말이 있다. 물질의 많고 적음보다 정성이 소중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선심을 베푸는데 중요한 것은 선심을 내려고 하는 마음이다. 이는 자기를 내세우려는 마음을 버리려는 자세이다. 이러한 자세를 무아봉공(無我奉公)이라 한다.

 

나를 낮추고 주변과 사회·국가·세계를 위해 성심성의를 다한다는 말이 무아봉공이다.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방종 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주변과 사회·국가·세계를 위해 성심성의를 다하자는 것이다. 개인 간이나 국가 간이나 모든 마찰과 불화가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나 자유 방종 하는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모든 불화와 이기심(利己心)의 근원을 따져 들어가 보면, 가장 깊은 뿌리는 ‘나’라는 상(我相)이다. 아상은 현재의 육신과 마음이 영원한 나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며 그 집착으로 인하여 오직 나만을 위하려는 생각이며, 더 나아가 내 가족 또는 내 자녀만을 위하려는 생각이다.
 

우리의 정신기운을 탁하게 하고 어둡게 하여 천만 가지 죄고를 불러오게 하는 탐ㆍ진ㆍ치 삼독심(三毒心)의 뿌리도 아상(我相)이다. 아상을 놓지 않고는 공익심이 나오지 않고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가 없다. 옛말에도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했듯이 나를 놓지 않고는 인(仁)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아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째는 지금의 내 몸과 마음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곧 ‘나’라는 존재가 인연 따라 나타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무상(無常)의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현재의 ‘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것(자연)들이 나에게 은혜가 되는 내역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은 자연으로부터 나서 자연 속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또한 이 세계는 일체생령이 함께 어울려 사는 큰 집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첫째,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무상의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인과보응의 이치를 깨쳐야 한다. 무상의 진리를 깨쳐야 나에 대한 집착심을 놓게 되고 인과보응의 이치를 깨쳐야 선행을 베풀고 덕을 쌓아 가는 일이 곧 자신을 위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둘째, 아상을 벗어나려면 자연의 은혜 되는 내역을 알아야 한다. 자연 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나올 수도 없었고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은 이웃과 함께 어울려 존재하므로 서로서로 의지를 하고 도움이 되는 것이며, 인생의 가치와 보람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아상을 벗어나려면 하나의 진리를 깨쳐야 한다. 하나의 진리를 깨치고 보면 사생(四生)이 한 몸 되는 이치를 알게 되고 시방삼계가 한집안인 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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